2017년 6월 29일
어제 밤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는 하루 종일 흐린 날이 계속되어 햇빛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도 숙소에 돌아와 보니 7부 바지 밑에 드러난 종아리 부분이 빨갛게 탔다. 아마 목 뒤쪽도 그랬을 것 같다. 얼굴과 손에는 선크림을 바르고 걸었지만 그래도 손목 아래쪽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이 그을렸다. 올레길을 걷기 위해서는 날씨에 따라 옷차림이나 기타 준비해야 할 부분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어차피 그런 부분을 크게 신경쓰는 편이 아니지만 나름대로 비를 대비하기 위해서 양말 속에 비닐을 넣고 등산화의 윗부분을 비닐로 덮었다. 바지도 긴바지로 입었고 등산화도 트레킹용 등산화를 신고 우의를 입고 출발했다.
광치기해변에 도착해보니 올레 스템프를 찍는 간세가 보이지 않는다. 잘 찾아보니 해변 쪽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스템프를 찍고 있는데 아까부터 올레길 차림을 한 사람이 다가오면서 자신도 스템프를 못보고 지나쳤다면서 다가와서 스템프를 찍는다. 어쩌면 이 분하고 같이 올레길2코스를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레길을 걷다보면 혼자서 걷는 그 고독한 시간이 너무 좋다. 어제 1코스를 걸을 때에는 올레꾼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하긴 여름에는 올레길을 걷는 사람이 많지 않을 듯 싶다. 잠시 광치기해변 쪽을 바라보면서 모른 체 했더니 그 사람이 먼저 출발한다. 한 100여 미터 거리를 두고 나도 출발해본다.
제주 올레길은 어느 곳을 걸어도 길이 참 좋은 것 같다. 늘 싱그런 풀과 나무가 있고 바닥은 야자매트를 잘 깔아놓아서 비가 와도 미끄럽지 않고 매트 사이로 작은 풀과 들꽃이 자라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황토흙길 처럼 보인다.
검정색 바위와 바다. 이런 풍경을 하루 종일 보아도 당연한 경치인데도 참 좋다. 흐린 날씨 탓에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저 앞에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지형을 보니 바다는 아닌 듯한데 마치 바다와 같은 내륙 호수의 풍경이 새로우면서 정겹게 느껴진다.
나뭇가지들이 우거져 있어서 마치 굴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나무 터널이 있었다.
내수면 뚝방길의 끝부분에 무슨 창고 같은 것이 있었는데 아까 시작할 때 만났던 사람이 비를 피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조금 후에 어떤 젊은 사람이 삼각대에 핸드폰을 거치하고 그 건물 안에서 창밖을 향해 사진을 찍는다. 제법 열심히 사진을 찍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더러 밖에 서보란다. 한 번 찍고 끝날 줄 알고 서보았더니 옆으로 가봐라, 방향을 틀어봐라 하면서 이곳에서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 액자 속에 있는 사진 같은 효과가 았다면서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자신만의 비밀 출사지라고 한다. 재미있는 친구다. ㅎㅎ 내 카메라를 돌려 받고 서둘러 발길을 재촉해본다.
저기 까지 어떻게 도착해서 배를 타야 하는지 물 가운데에 배가 정박해있는 모습이 보였다.
길은 식산봉으로 이어진다. 제주의 모든 오름이나 봉우리들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그저 동네 뒷동산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어디를 올라도 오르고 나면 바람이 시원하고 사방의 조망이 활짝 열려있었다.
비를 맞아서 더 싱그럽고 선명한 푸른 빛이 보기에 좋았다.
비 내리는 어두운 숲은 고즈넉하고 깊은 사색의 길로 인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망대에 올라 보니 비내리는 날씨에 안개마저 자욱해서 풍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시원하고 운치가 있었다.
마치 어둠을 뚫고 빛으로 향해 나가는 듯한 이런 오솔길이 내게는 참 나가기 싫어질 만큼 좋은 느낌이었다.
식산봉을 내려서니 저수지 같은 곳에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이 물은 바다가 아니라 민물이었다.
바다인 듯, 호수인 듯한 이런 낯선 풍경이 나는 너무 좋았다.
족지물이라는 곳이다. 위쪽은 여자탕, 아래쪽은 남자탕이란다. 여기에서 채소도 씻기도 하고 주민들이 몸을 씻기도 했던 곳이라 한다.
오조리 마을회관 근처의 일반 가정집인데 마당이 예쁘다.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대문처럼 도열해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마을회관 화장실에 잠시 들러 내 사진을 찍어본다.
길은 다시 내수면 둑방길로 이어진다. 얼핏 저수지처럼 보이지만 바닷물이 교류하는지 곳곳에 미역도 있고 바위에는 어린애 주먹만한 게들이 내가 지나갈 때마다 쏜살같이 바위틈으로 숨어든다.
내수면 둑방길이 끝나면 길은 마을길로 이어진다.
가시아방이라는 국수집인데 다음날까지 몇 번을 지나치면서 보았는데 갈 때마다 저렇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그 다음날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혼자 사는 것 같아 이 집에서 돔베고기와 국수를 포장해서 게스트하우스에서 같이 먹어보았는데 돔베고기 맛은 좋았었는데 국수는 포장을 해가서 그런지 불어서 제 맛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유명한 국수집인 모양이었다.
어찌 하다보니 중간 스템프를 찍을 수 있는 홍마트를 눈 앞에 보고도 스템프를 직지 않고 지나쳤다. 이 해장국집 앞 처마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올레길 안내책자에 홍마트를 지나면 2코스 끝까지 식당이 없다는 글이 생각나서 이집에 들어가 소머리해장국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주인 아주머니가 홍마트로 돌아가서 스템프를 찍고 오라고 한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내 마음에 이미 모든 풍경과 기억이 도장처럼 찍혔는데 굳이 중간 스템프를 찍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식당 앞에 우의를 벗어서 잠시라도 말려보려고 걸쳐놓았다.
올레스템프 북과 내 카드가 들어있는 핸드폰, 비를 막아주는 내 모자 등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는데 왠지 의미기 있어보여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식당에서 나와서 바로 앞에 있는 정자에 앉아서 감귤밭을 구경했다. 제주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런 풍경이었다. 검은 돌담이 둘러진 밭에는 거의 대부분 무엇이 되었든 작물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나무숲이 이어지고 ...... 내 생각에는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저 곳에서 찍었다고 해도 구별해낼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를 가도 거의 비슷한 풍경인데도 나는 이런 풍경이 보기에 좋았다. 동트기 전부터 새들이 지저귀고, 길을 걷다보면 꿩들이 갑자기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른다. 경작을 하지 않는 밭도 모두 검은색 돌담이 둘러져 있고, 검은 색 돌담과 유난히 대비되는 푸른 나무와 식물들. 이렇게 똑같은 모습의 풍경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나는 지루하지 않고 보기 좋게 느껴진다. 갑자기 혹시 내가 전생에 제주에서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제주의 모든 풍경은 내 마음 속 고향의 원형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 걸은 길이 15.1Km이고 오늘도 14.5Km를 걷는다. 항상 똑같은 풍경을 보면서 걷고 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걸으면서 더 힘이 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언젠가 훗날에 내가 제주에 살고 있을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대수산봉으로 이어진다. 대수산봉을 오르면서 빗줄기는 더 거세지고 그 기세가 사그러질 줄을 모른다. 나름대로 비닐로 등산화를 덮었지만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벌써 등산화 속에서는 가득찬 빗물이 걸을 때마다 발을 간지르면서 왔다 갔다하는 것이 느껴졌따.
대수산봉은 크게 제주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완만한 경사길이라 오르는데 어렵지 않았다. 다만 계속 쏟아지는 비줄기와 풍경을 덮어버리는 안개가 야속할 뿐이다.
길은 다시 중산간 마을길로 이어진다.
도중에 이렇게 땅을 파놓은 곳을 보았는데 이곳을 보니 왜 제주도에 돌이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제주를 걸으면서 땅을 파놓은 곳을 보니 온전한 흙더미를 본 적이 없었다. 땅을 파놓은 곳의 공간과 파 낸 돌을 쌓아놓은 곳의 부피가 거의 비슷했다. 처음에 돌을 파놓으면 볼품이 없어보이지만 그냥 두다보면 세월이 흘러 긁히고 색이 변해서 멋진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오늘처럼 이렇게 억세게 비가 내리는 데도 흙탕물이 거칠게 흐르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제주도는 땅이 물을 바로 받아들이는 것 처럼 느껴졌다.
혼인지에 거의 도착했다. 바다에서 상자 속에 든 세 명의 여가자 떠내려와서 혼인지에서 합방을 해서 제주도 사람의 기원히 되었다는 전설을 설명하고 있는데 말도 되지 않을 이야기지만 혼인지의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비가 내려서 관람객 한 명도 없는 조용한 분위기의 혼인지 공원을 걷다보니 내 마음이 평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삼신인과 삼공주가 합방을 했다는 신방굴의 모습이다.
혼인지를 나오면서 보게 된 능소화가 참 예쁘다. 나는 능소화를 알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볼 때마다 기품이 느껴지는 우아미가 있는 것 같다. 나중에 내 집에도 능소화를 심어놓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상상을 해보았다.
길은 다시 바다로 이어진다. 오늘의 목적지는 온평포구이다. 아래의 사진처럼 돌로 쌓은 성이 환해장성이다. 성곽의 총 연장이 120Km라는데 솔직히 썩 믿겨지지 않는다. 바람과 파도가 많은 제주도에서 유실되기 쉬울텐데 그 먼 거리의 성곽을 잘 유지보수했을까 싶은 생각이다.
드디어 온평포구의 올레간세에 도악했다. 여기서 택시를 타고 광치기해변으로 가서 내 차를 회수해서 새로운 숙소로 집사람이 예약해준 하늘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새로운 숙소는 중산간 마을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깨끗하게 잘 지어진 게스트하우스인데 지금이 불경기라 그런지 손님이 나밖에 없다. 1박에 2만5천원인데 손님도 없으닌 연박하면 2만원만 받겠다고 한다. 손님도 없는데 할인까지 해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듯이 눈치만 보았는데 다음날 내가 가시아방에서 돔베고기와 국수, 그리고 좋아한다는 우도막걸리를 사서 같이 먹으면서 대화를 해보았는데 무슨 사연이 있는지 가족은 없고 혼자 있는 눈치였다. 마누라 덕에 놀면서 제주도 여행이나 가고 숙소도 예약해준 내 마누라를 엄청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나더러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은 구한 사람이라나 뭐라나. 맞는 말이다. 내가 마누라를 잘 고르긴 한 것 같다. 그저 몸이나 건강하고 나보다 먼저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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