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참 오래도 쉬었다.
얼떨결에 시작한 당구장을 그만두면서 집사람에게 던지듯이 말했다.
"좀 쉬고 싶다. 쉬면서 늘 그립던 제주에 한 달 정도 다녀오고 싶다."
사실 딱히 올레길을 걷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달을 제주도에서 뭐하면서 지낼거냐라는 물음에 의무적인 대답으로 올레길을 걷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동안 놀고 지내면서 기타를 배우네 캘리그라피를 배우네 했지만 기타 수업은 두 번 하다가 그만두었고 , 그나마 캘리그라피는 조금 재미를 가졌을 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술 마시고, 당구장 다니면서 놀았을 뿐이었다.
얼마전에 집사람이 이제는 그만 놀고 사무실에 나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을 때 나 또한 이런 무위도식을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도에 다녀온 후에 출근할께."
그러고도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았다. 집사람의 재촉에 쫒기듯 배편을 예약한 뒤에 올레길에 대한 블로그 몇 편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주로 향했다.
2017년 6우ㅝㄹ 27일 새벽 4시에 내 차를 타고 목포로 출발했고 목포에 6시 반쯤 도착해서 전부터 한 번 가봐야지 라고 생각했던 해남해장국에 들러서 뼈해장국에 소주를 한 병 마시고 산타루치아호를 타고 제주로 떠났다.
한 4시간 쯤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아침 9시에 목포항을 출발한 배는 거의 2시 경에 제주항에 도착했고 차량 하선을 마친 시간은 3시쯤 되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제주에 도착했고, 내일부터는 올레길 26코스를 걷게 될 것이다.
대전에서 미리 예약해둔 강병희 이장 민박에 도착해서 대충 짐을 정리하고 지난 달에 다녀왔던 성산일출봉 근처에다시 가서 제주뚝배기라는 식당에서 물회를 시켜서 막걸리 한 병을 마셨다. 평생 남보다 많이 여행을 다녔지만 늘 집사람과 함께였지 혼자 다닌 적은 별로 없었다. 올레길을 걷는 것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지난 주에 예행연습 삼아 지리산종주도 하고 온 터이고 올레길 자체가 그다지 힘들 것 같지는 않지만 혼자 걷고, 혼자 자고, 헌자서 밥 먹고, 집사람 없이 혼자 술 마셔야 한다는 느낌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민박에 도착해서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검은 색 돌담, 푸른 나무와 풀, 대충 보아도 참 좋아보이 흙 땅, 아침이면 시작되는 새소리,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
'그래 내가 제주에 도착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돌담으로 둘러쌓인 넓은 밭, 골목 마다 검은 현무암으로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을 보니 제주라는 것이 느껴진다. 하다못해 골목의 강아지들도 나를 졸졸 따르는 것이 좋은 예감이 들었다.
민박집 앞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방에 들어와서 제주에 올 때 제일 먼저 챙겼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펼쳐 읽는다. 조금 후에 집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주 금요일에 제주로 와서 3개의 코스 정도를 같이 걷자고 한다. 반갑고 고맙다.
다음날 새벽에 눈을 떠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침식사가 준비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가까운 성산일출봉에 가본다.
일출을 기대했지만 날이 흐려서 해 뜨는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일출을 볼 수가 없다.
민박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너무 이른 시간이라 동네를 한바퀴 더 돌아보았다. 새벽 풍경이 좋다. 자귀나무 꽃도 예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민박 주인이 내 차를 1코스 끝지점인 광치기해변에 주차를 시키고 자신의 화물차에 나를 태우고 시작지범까지 데려다 준다.
아침에 이럭저럭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막상 길을 시작하려니 땀을 닦을 수건도, 스틱도 챙기지 못했다. 수건이야 없으면 옷 소매로 땀을 닦으면 되고, 스틱은 결과적으로 차라리 챙기지 않기를 잘했다. 하지만 아침 식사 후에는 반드시 볼일을 보는 나로서는 화장지가 없는 것이 큰 일이다 싶어서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구해본다. 다행히 아침 일찍 문을 열어 놓은 카페가 있어서 카페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 종이 몇 장을 얻어왔다.
올레길1코스를 알리는 간세이다. 이 안에 출발 스탬프가 있다. 이제 정말로 올레길이 시작되었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 진행하니 바로 올레길 안내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볼일을 본 후에 가뿐한 마음으로 출발해본다.
바로 정자가 나오는데 아마도 올레길을 출발하는 사람들이 소망과 기원을 적어서 매달아 놓은 모습이 보였다.
말과 소들이 통과할 수 없고 사람들만 돌아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었다. 제주에서는 이런 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흐린 날씨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먼 곳의 경치가 제법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말미오름 정상 부근에는 이렇게 소떼가 길을 차지하고 비켜주지도 않는다. 한 두 마리도 아니고 이렇게 떼로 모여있으니 별 수 없이 내가 비탈길로 돌아서 피해간다.
말미오름 정상부터는 바람이 참 시원했다. 정상에서는 사방이 다 내려다 보여서 제주의 풍광이 볼 만했다. 대체로 제주 오름길은 길이 걷기에 참 좋다. 길은 편안하고 자주 올레길 표시가 붙어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여기가 알오름 정상이다. 역시 사방이 조망되고 바람은 시원하다.
이제 알오름을 내려서면 종달리를 지나서 계속 해안도로를 따라 올레길이 이어진다. 제주에서 놀라운 것은 모든 밭이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돌담이 쳐져 있지 않은 밭을 본 적이 없다. 돌이 흔하기도 하고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지만 어떻게 저 모든 밭에 정성스럽게 돌담을 쌓았는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제주에는 곳곳에 수국을 참 많이도 심어놓았다는 것을 느꼈다. 능소화도 예쁘지만 담장 옆에 심어진 수국도 보기에 좋았다.
올레길 1코스의 시작은 시흥리에서 했다. 이곳 종달리는 1코스에 속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인 26코스가 끝나는 지점이다. 예전에 제주도에 관리가 섬을 둘러보며 시찰을 시작했던 곳이 시흥리이고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종달리라고 했다 한다.
올레길 곳곳에는 이런 공덕비가 여로 곳에 있었다. 공덕비든 송덕비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었을까 싶다.
이제 하안도로를 타고 올레길은 이어진다. 날씨는 흐리고 해안가라서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서 걷기에 좋았다.
해안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이런 정자가 있어서 잠시 쉬어본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별로 쉬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힘든 오르막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리를 풀기도 하지만 보통의 산행을 할 때처럼 길게 쉬지는 않았던 것 같다.
1코스 중간스템프를 찍을 수 있는 목화휴게소에 들러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탁자에 놓여 있었던 제주 출신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았다.
준공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것인지 거의 다 지은 건물이 방치되어 있었다.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내가 묶고 있는 민박집 동네 근처까지 왔다. 이곳 길가에 있는 올레길해녀의집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으로 해물뚝배기와 우도 땅콩막걸리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어제 오늘 계속 점심과 저녘마다 술을 마신 것 같다.
오소포연대라는 곳이다. 아마도 해안 봉수대의 역할을 하던 곳이라는데 넓적한 돌판이 있어 잠시 누워 쉬려고 누웠지만 아주 뜨겁게 달구어진 상태라 눕지도 못하고 서서 바다만 바라보다가 나왔다.
어느새 성산일출봉 근처까지 도착했다. 펜션으로 보이는 건물이 새로 지어진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서 숙박하는 사람들은 방 창을 통해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개인 사유지인데 올레길을 위해 개방해주었다고 한다. 마침 바다를 바라보기 좋은 위치에 의자가 있어서 한참동안 앉아서 바다구경을 했다.
이곳에는 이생진 시인의 시들을 새겨놓은 시비들이 여러개가 있었다.
성산일출봉을 지나 수마포해변쪽으로 진행한다. 이쪽에서는 일출봉의 모습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백련초 꽃이 참으로 예뻤다.
제주 해변 모래사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식물인데 자세히 보면 잎이 참 예쁘다.
제주 4.3희생자 위령비이고 이곳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광치기해변이다.
승마체험을 하는 곳인데 말구경을 하다가 바로 옆에 있었던 올레길 종점 스템프를 발견하지 못하고 차를 회수해서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올레길 종점 스템프를 찍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돌아가서 찍고 올까 하다가 어차피 내일 출발할 2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니 내일 찍기로 하고 오늘 1코스를 마감한다. 올레길1코스는 처음 시작해서 그런지 낯설은 제주의 풍경과 말미오름과 알오름에서의 시원한 조망이 좋았었다. 이곳에서 시작했으니 제주를 떠나서 집으로 돌아가서도 이곳의 풍경들이 그리워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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